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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파와 오메가라-한홍 목사: 갓피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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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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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편집]

성구[편집]

의미[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알파와 오메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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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는 누구 혹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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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성경의 대답

하느님께서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처음과 마지막”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요한 계시록 2213을 보면 예수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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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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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와 오메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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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Α)와 오메가(Ω) – 크리스챤월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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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 성구 명상 < 성경 < 신학과 신앙 < 기사본문 - 크리스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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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 성구 명상 < 성경 < 신학과 신앙 < 기사본문 - 크리스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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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Α 또는 α) 와 오메가(Ω 또는 ω)는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어구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서에 이 형태로는 나타나지는 않지만, 자주 ‘ΑΩ’ 혹은 ‘알파와 오메가’에 상당하는 각국어(예를 들어 Alpha et Omega, Alpha and Omega)로서 언급된다.

전거 [ 편집 ]

신약 성서의 ‘요한의 묵시록'(1:8, 21:6, 22:13)에, 주님의 말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다”[1]( 코이네 그리스어: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영어: I am the Alpha and the Omega)로서 나타난다. 덧붙여 21:6 22:13에서는 이 구의 뒤에 “처음이며 마지막이다”라고 덧붙인다.

성구 [ 편집 ]

이사야 41장 4절 :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이사야 44장 6절 :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요한묵시록 1장 8절 :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묵시록 21장 6절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묵시록 22장 13절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의미 [ 편집 ]

그리스 문자의 최초의 문자 Α(알파)와 마지막 문자 Ω(오메가)를 늘어놓아 최초와 최후, 즉 “모두” “영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말씀이 있다. 즉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분 자신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인가? 그것은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떠함은 우리의 어떠함에 대한 지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격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살아내야 할 우리의 실존에 관한 언급이다.

이 글에서는 그 모든 것을 다 검토할 수 없다. 다만 간략한 소개만 하고 계시록에 있는 그분의 자신에 관한 언급의 의미만 보고자 한다.

구약의 대표적인 하나님 자신에 관한 언급은 모세에게 하신 다음 두 말씀이다.

– 출3: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 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 AM THAT I AM

여기에 더하여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과 같은 여러 여호와의 이름들은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소개하는 말씀들이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서 이루어져야 할 실존의 신앙들이며, 믿음의 실체들이다. 특별히 이름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 뒤에 붙어 있는 명칭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이름은 이름이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 즉 제물(이레), 승리(닛시), 평강(샬롬), 치유(라파)와 같은 것들은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별도로 그것을 달라고 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종교의 차원에 있을 때 하는 일이다. 하기야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아브람 때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 명칭들의 실재는 바로 그분 자신이며, 동시에 그분 안에서 즉 그분과의 연합 안에서 우리의 것이며 이미 우리의 존재이다. 이를 주께서 산상보훈에서 선포하셨다. 내가 여기 있고 복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복 있는 자이다. 그 복 있는 자의 삶의 실존이 가난한 영으로, 애통하는 것으로, 온유와 같은 것들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그분이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구체적 삶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애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그분의 주권이다. 문제는 내가 그분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 에 달려있다. 매우 냉정한 것 같지만 영적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나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었다. 왜냐 세상은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에게 이해되어지지도 않을 것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응답하시지 않는다. 방법이 없다. 그냥 오늘을 사는 것뿐이다.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다만 내 중심이 타협하지 않고 비굴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라! 언젠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렇게 오직 다만 감사할 날이 올 것이다. 완전한 해방의 날이 올 것이다. 아니 이미 왔지만 내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 주님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지 않았는가! 삶은 그렇게 모진 것이다.

잠시 벗어났지만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의 참된 의미는 바로 그분 자신이다. 예를 들어 ‘여호와 이레’의 경우 ‘여호와가 준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분이 받으실 제물은 그분이 준비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분에게 만족이 되는 제물은 그분께서 준비하시는 아들이신 그리스도 밖에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준비해서 그분께 드리려고 한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드리네 뭐하네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가인의 제사인데 이처럼 우리는 본성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세우려 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있고 체질이 되어 있다. 아니 우리 첫 사람의 자아가 그것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사실상 이것을 깨뜨려 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분 자신을 다시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는 그러하다. 십일조는 그렇게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들은 동일하게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전부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에고 에이미’(나는 ~ 이다) 용법으로 예수께서 자신에 관해 소개를 하셨으며, 때로는 제자들의 대답이나 고백을 통해 그분을 소개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등이다.

그런데 성경 전체의 완성인 계시록에 하나님께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

맨 위에 계시록에 나온 3 구절을 인용해 놓았는데,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것이 점진적 방법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1장 8절에는 ‘알파와 오메가’로 21장 6절에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로 그리고 22장 13절에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로 소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1가지, 다음에는 2가지, 마지막으로 3가지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이 우리의 개념(이름)으로 한정될 수 있는 분인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 바르게 이해되지 않으면 성경 전체를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분이다. 신과 피조물의 본질의 차이가 그러한 것이다. 그분은 무한이요, 영이요, 초월이다. 그런 분이 자신의 영원한 경륜을 따라 흙의 먼지에 불과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심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계시되었으며 그리고 그에 관한 내용이 성경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분이 스스로를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이다.

두 번째로 성경을 통해서 소개된 그분의 계시는 모든 인류를 향한 일반적 계시와 그리고 특별히 그분의 아들들이 될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계시된 것이지 그분의 신적 본체 자체가 전부 계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비밀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계시되셨으나(‘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우리가 드러난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전부 아는 것이 아닌 것처럼(이는 삼년 반이나 함께 하였으며 또한 부활하신 그분과 40일 동안 함께 하고도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증명이 된 것이다.) 우리 인식의 면에서는 그분은 여전히 비밀 가운데 계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분량이 자라는 것만큼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을 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영의 특성이 그러하다. 그분은 영원히 늘 새로운 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로는 알 수 없는 신비이다. 이것을 개념화하고 고정화하고 형상화하면 그 순간 우상이 되어 버린다.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아론이 금 부치를 던졌더니 송아지가 튀어 나왔다 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으면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나아가서는 형상화하려는 본성이 있다. 이것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천주교나 기독교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내 안에도 그런 것이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와 미스테리와 기쁨은 한 면으로는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을 알아간다는데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종교에도 없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공교한 철학에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 하다가 오히려 스스로 빠지고 만다. 그 양 극단이 율법주의와 그리고 하늘에 완성된 것만 쳐다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인간의 논리로 결론 내려고 하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받을 심판은 독사의 자식들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 둘 중 하나이다. 이 둘 다 그 원인은 십자가의 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온 우주는 그분의 계시가 드러난 표피이다. 그분 자체는 여전히 비밀한 가운데 있다. 온 우주는 ‘티데미’(τίθημι to lay by 옆으로 질서 있게 놓다)로 ‘코스모스 κόσμος’(우주, 질서, 단장)를 이루고 있다. 즉 하늘의 진리를 차서대로 차례차례 진열해서 놓은 것이 우주요, 만물이다. 그리고 하늘의 것을 이 땅에다 옮겨서 모형으로서 보여준 것이 성막이고 성전이다.

코스모스를 깊이 파고들면 과학이 끝없이 발전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해도 하늘에는 결코 연결될 수 없다. 그래서 무한이 유한으로 침투되어 온 것이 십자가(스타우로스)이다. 이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위로 세운 기둥이다. 야곱의 사닥다리이다. 곧 ‘히스테미’로 궁창을 뚫고 하늘 위로 선 것이다.(히스테미 ἵστημι → 스타우로스 σταυρός) 이것 없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늘에 연결될 수 없다. 이 길 외엔 없다. 이런 저런 길이 있다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마귀가 주는 미혹이다. 그 유일한 길의 실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그분만이 휘장을 찢을 수 있고 궁창을 깨뜨릴 수 있다. 왜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외에는 하늘에 오를 자가 없기 때문이다.(너희는 아래에서 났으나 나는 위에서 났다.) 그래서 그분만이 위에 있는 생명수의 원천을 우리의 배에 주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수 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belly)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겔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러므로 육신의 욕심을 채우던 배(belly)가 생명의 배로 변화되는 길은 십자가 외에 없는 것이다.

물론 구속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기는 하셨지만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과 그분을 얼굴로 마주 대하고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온전히 알게 되어질 때까지는 그분은 여전히 비밀이시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한 분이 우리를 그분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 역사 가운데 즉 무한이 유한 가운데 들어오셨다. 거룩이 거룩하지 않은 것에 들어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자신의 전능성과 무소부재함을 제한하셨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거룩 앞에서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 소멸을 막기 위해서 그분은 이미 영원 전부터 죽었으며(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 비밀을 때가 이르매 이 땅에서 펼치셨다.

주께서는 그렇게 육신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고 부활하셨다. 이 방법 외에는 무한한 분이 피조물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죽음과 새 창조와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연합을 통해 우리는 그분과 父子관계의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關係的 存在性’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모든 이단들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루시퍼처럼 바벨론처럼 일순간에 곤두박질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밀과 은혜를 영원히 품고서 아버지의 아들의 영광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상징으로 나타난 것이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 진주 문을 통해 그 성을 들고 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새 창조의 여정에 일곱 별이 되도록 자신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말씀들이 있다. 앞에서 소개한 것들이다. 이것은 너무나 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정표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내고 가져야 할 실존이다.

2.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계시록에 있는 구절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것을 먼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이 위에 제시된 본문을 한글 성경에서 찾아보시면 성경마다 제 멋대로 번역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번역자들이 의미를 모른 채 문자로만 번역을 하다 보니 일관성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먼저 원문을 확인하여 기준을 세운 후 그 의미를 알아보아야 한다.

설명의 편의상 용어를 원문 단어의 본래적 의미에 맞게 새롭게 정의하여 번역하였다. 물론 이 단어의 의미는 성경에서 문맥에 따라 다소 다르게 표현될 수는 있다.

<원 문> <번 역>

• 알파(Ἄλφα)와 오메가(Ὦ) → 알파와 오메가

• 아르케(ἀρχὴ)와 테로스(τέλος) → 근원과 궁극

• 프로토스(πρῶτος)와 에스카토스(ἔσχατος) → 처음과 나중

이를 따라 세 구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λέγει κύριος ὁ θεός ὁ ὢ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 ὁ παντοκράτωρ

–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근원과 궁극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καὶ εἶπέν μοι γέγοναν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ἡ ἀρχὴ καὶ τὸ τέλος ἐγὼ τῷ διψῶντι δώσω ἐκ τῆς πηγῆς τοῦ ὕδατος τῆς ζωῆς δωρεάν

–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근원과 궁극이라”

ἐγὼ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σχατος ἡ ἀρχὴ καὶ τὸ τέλος

* 킹제임스 성경이 채택한 스테판 사본은 원문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큰 범주에서 본 설명을 응용하면 해석이 가능하므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 세 부류의 단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고 각각의 본문을 해석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가.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

헬라어 철자는 24자이며 첫 글자가 알파이고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이다. 이 24 글자로 하나님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시고 진리를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는 전체 24자를 나타내며 또한 계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하늘과 영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알파에서 시작해 오메가까지의 조합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전체의 통일성을 이루면서 계시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의 통일성은 결국에는 한 인격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우리의 시각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가 보는 ‘이 책이 나에 관해 기록한 것’이라 한 것이다. 당연히 신약은 그분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가 가리키는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공교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과녁을 빗나가고 있다고 진단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 구원, 거듭남, 성령, 침례, 심판, 종말, 교회와 같은 모든 것들은 이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과의 관계성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지 아들과 별개로 찾는 순간 이 역시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또한 알파와 오메가는 계시에 초점이 있지만 성경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온 우주적인 계시에 전부 적용되는 개념이다. 그 모든 계시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인 것이다.

계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과 관련하여 간략히 알파와 오메가의 실제적 의미를 찾아보면 처음 사람 곧 알파의 사람의 원형(prototype)은 아담이고, 두 번째 사람 곧 오메가의 사람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둘째는 처음을 안다. 그래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러 온 것처럼 둘째 사람은 첫 사람을 내포한다. 그러나 첫 사람을 근원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첫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은 아니다. 굼벵이가 나비가 되면 다시 굼벵이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의 세계를 구성하는 우리는 선악을 알고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계속 그것에 머물면 안 되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즉 알파에서 오메가의 생명으로, 실존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대의 삶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실존은 여전히 첫 사람 곧 알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사랑과 거룩의 실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을 만나는 카이로스의 시대의 삶으로 우리는 옮겨야 한다. 그것이 참된 ‘나’를 찾는 길이다. 도를 닦고, 명상을 하고, 수양을 해서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메가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런 삶을 살까? 우리 앞에는 알파의 시대에서 오메가의 시대로 실존을 옮기는 큰 일이 남아있다. 이것을 대전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백세에 이삭을 낳게 될 것이다.

왜 아버지께서 이 말을 했는가? 왜 나는 알파요 오메가의 하나님이라 했는가?

이것이 나의 이야기로 끝나면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버지가 알파와 오메가이면 네게도 알파와 오메가가 일어나야 한다!

나. ‘아르케’와 ‘테로스’이신 하나님 ; 근원과 궁극이신 하나님

‘아르케’는 성경에서 ‘태초, 시작, 처음, 근본 등’으로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는데 본래의 의미는 ‘~이 시작된 근원’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가 대표적으로 사용된 곳이 요1:1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다. 그리고 창세기의 첫 단어인 히브리어 ‘베레쉬트’(태초에)가 헬라어로 ‘아르케’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출발점인 근원을 말하며 이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어 나온 하나님 안에, 영원 안에 있는 근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근원을 관념으로는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으니 바로 아르케 안에서 로고스의 말씀으로 계시다가 우리와 동일한(호모이오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르케’ 곧 하나님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복음서에서 선포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 증거 되었고, 서신서에서 정의 되었으며, 계시록에서 완성되었다. 특별히 어린 양의 상징을 통해 모든 우주의 근원인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사랑을 안다면 근원을 아는 것이다. 아르케를 아는 것이다. 모든 창조와 존재는 바로 이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으로 ‘테로스’는 이 역시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귀결하는 영원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 있는 목적지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테로스’는 ‘결국, 나중, 끝, 목적, 결말 등’으로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 도달점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본래 하나님은 시작도 출발도 귀결도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나타나고 계시된 하나님으로서는 영원 안에서 ‘아르케’를 가지시고 그리고 ‘테로스’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케’와 ‘테로스’는 피조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영원에 속하기 때문에 이 영원의 의미를 나타낼 때는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와 역사의 근원과 궁극을 나타낼 때는 정관사가 붙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 우주의 모든 역사가 시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흐르고 있으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원인 아르케에서 나와서 다시 영원인 테로스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품에서 나와서 그분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 전4: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 전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그렇게 역사는 시공에 흔적을 남기고 에베소서의 창세 전 언약이 있었던 그곳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을 통해 먼지와 재에 불과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기적과 영원으로의 편입이 있었으니 이 역시 하나님의 미스테리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영원성을 우리를 위해 제한 받으시고 시간 안으로 들어옴으로서 영원을 이 땅으로 가져오시고 시작과 종국이 생기도록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에 시작과 끝이 생긴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지만 바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이 신비를 행하셨기 때문에 육체로 제한 받으시고 죽고 부활하심이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천국은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를 침노하고 있다.(마11:12) 다만 우리가 붙잡기만 하면 그 아르케와 테로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영원과 시간이, 하늘과 땅이, 무한과 유한이 충돌하고 침노하여 아들을 만들고 하늘로 다시 돌아가는 이 신비는 내가 느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말로는 설명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근원은 모든 것의 원천을 말한다. 그리고 궁극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삶의 동안에 모든 것을 원천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서 찾으면 다 빗나가는 것이다. 그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랑이다. 이것이 참 근원이다. 이에서 빗나가면 다 잘못된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여 가는 것이 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의 참 의미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있을 때가 가장 잘 이를 느끼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을 벗고 천사와 같이 되고 나면 그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자.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본질이요 기회이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다. 그래서 이 사랑 안에서 우리가 육신의 삶을 통과하면서 그분이 다 성취하신 그 사랑을 함께 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육을 입고 이 땅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이며 교회로 함께 하는 의미이다.

육을 입고 고달픈 삶을 살지만 조만간 궁극인 영원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 함께 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이다. 그래서 그것을 영원하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일은 ‘아르케’에서 시작되어 ‘톨도트’(대략, 계보 ; 창세기2장, 마태복음1장)로 성취하신 후 ‘텔로스’에 이른다. 그의 일하심은 단절이 없이 지금도 진행된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 하셨다. 이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내가 힘써 수고하노라!’ 바울의 이 고백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 고백 또한 나의 고백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테테레스타이’(다 이루었다 * 테로스의 파생어)인데 그는 이를 통해 육신의 처음 시대를 마감하고 영의 나중 시대를 열어놓으셨다. ‘테로스’를 십자가에서 시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영원이 유한 안에 큰 흔적을 남긴 것이다. 즉 종교, 도덕, 윤리, 수양, 사회정의, 기복, 명예, 돈 등의 모든 육적 가치를 마감하였다. 끝장 낸 것이다. 이것을 십자가의 도로 완전히 끝을 내고 영과 생명과 진리와 실체의 시대를 여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 아니 이미 동참한 자이다. 내가 다 모를 뿐!

왜 아버지께서 이 말을 했는가? 왜 나는 아르케요 텔로스의 하나님이라 했는가?

이것이 나의 이야기로 끝나면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버지가 아르케와 텔로스이면 당신도 거기에서 답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 ;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이신 하나님

‘프로토스’는 역사 속에서의 일의 시작과 관련된다. 그리고 ‘에스카토스’는 역사 속에서의 그 일의 종결과 관계된다. ‘아르케’와 ‘테로스’가 영원 차원의 것이라면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는 시공 속에서 즉 ‘아르케’(근원) → ‘톨도트’(대략, 계보, 연대기, 족보, 구속역사 등) → ‘테로스’(궁극)의 하나님의 경륜의 싸이클 가운데서 ‘톨도트’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런 계획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그분은 단 번에 행하지 않는다. 반드시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분이 능력이 없어 그렇게 하는가? 아니다. 우리를 참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가 그분의 참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천년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를 천사처럼 단 번에 온전케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분의 참 사랑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종들이나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종이다. 그래서 우리를 경이의 눈으로 부러워하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를 주신 것은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이 되는 것은 잉태의 고통과 성장의 아픔이 따른다. 아들들인 우리도 베틀의 북처럼 잠시 왔다가는 이 세상을 사는데도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더 찢어지겠는가! 그러나 이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의 과정이 없이는 우리가 온전한 아들로 설 수가 없다.

주께서 우주적이며 영원에 속한 일을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영원히 종결하셨다. 그러므로 영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 그것이 새 창조이다. 새 창조는 한편에서는 완성되었다. 즉 존재적으로는 완성되었다.(고후5:17) 그러나 우리의 실존에 있어서는 지금도 각자에게서 하나님께서 새 창조의 일을 행하고 계시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 가지지 못한 하나님의 모양을 가지는 것과 관련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26절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지만 27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되어 있음을 무엇이 다르고 차이가 있는지 유의하기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지만 우리의 실존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형상 즉 그분의 내면적 형상인 몰페(μορφή ; 내재적이며 본질적인 모습(“figure, shape, fashion”, as that which is intrinsic and essential)는 아직 온전히 우리에게서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여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한 때 두 때 반 때’라 하기도 하고 ‘마흔 두 달, 일천이백 육십일, 반 이레, 삼년 반, 사십이 처소, 사십이 대’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스카토스’를 향해 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프로토스는 ‘시작, 먼저, 처음에’ 등으로 번역되며, 에스카토스는 ‘끝, 마지막, 종말, 나중’ 등으로 번역된다.

특별히 에스카토스가 종말론(에스카톨로지)과 관련되어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다만 사실상 종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사단과 세상을 심판하셨을 때 이미 우리에게 도래하였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삶은 이런 의미에서 날마다가 종말 즉 에스카토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에스카토스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실존적으로 만나는 카이로스의 때에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아내야 할 종말이다. 이것은 자기부인이며, 도피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실존적 종말은 가지지 못한 채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은 마치 내용은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골뱅이와 같다 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처럼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족한 줄 알며, 이 내면의 종말의 실존 곧 그리스도를 누리는 삶을 순간순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프로토스로 시작한 것을 에스카토스로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나중의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의 1-2절이 우리의 처음의 존재 양태 곧 프로토스라면 3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우리의 나중의 존재양태 곧 에스카토스이다. 이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혼돈(토후)하고 공허(보후)하고 흑암(호세크)이었던 것이 여섯 날을 거치며 질서가 잡히고, 온갖 동식물과 사람으로 채워지며, 빛과 광명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더라(토브) 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되게(바라크), 거룩하게 하시고(카다쉬)하시고 안식(싸바스) 하셨다. 천상의 최상의 언어가 다 동원되었다. 1장은 첫 창조와 새 창조의 청사진이며 압축판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가진 생명이 1장 1-2절이다. 모든 것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우리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가운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섯 날의 새 창조를 통해서 우리를 나중의 존재 곧 에스카토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한 면에서는 하늘에 완성이 되어 있다. 흠도 없이 티도 없이 단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여섯 날의 창조를 통해서 천상에 이루어진 것을 알아가고 실존적으로 體化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 야다)이 아니다. 또한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실질적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즉 이것이 진정한 종말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처럼 하늘 것만 보고 다 되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밤이 오고 아침이 와야 한 날이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여섯 날이 지나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몇 날을 지냈는지요? 이 육신을 입은 날을 소홀히 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운 구원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하늘의 일은 신비한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마귀는 우리를 율법주의 아니면, 영적 방임에 곧 좌우로 치우치도록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다. 율법주의는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며, 영적 방임은 오늘 내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다. 둘 다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다.

왜 직접 주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을까? 주가 가르쳐 준 기도는 바로 프로토스에서 에스카토스로 옮겨가도록 우리를 위해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그 안에 여섯 날의 새 창조가 들어 있다.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서 계시록 마지막 까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를 즉 프로토스로 시작된 우리를 에스카토스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톨도트 곧 대하드라마이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에스카토스의 존재로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고 나의 삶에서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에 동역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의 사지가 잘리고 오체가 절단되는 아픔이 동반된다. 주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는가!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다. 우리에게도 그런 노정이 기다리고 있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번 들여놓으면 돌이킬 수 없다. 종교와 마귀는 이를 흉내 내어 五體投地를 한다. 늘 이렇게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옆에서 미혹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는 길이다.

왜 아버지께서 이 말을 했는가? 왜 나는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의 하나님이라 했는가?

이것이 나의 이야기로 끝나면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버지가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이면 너도 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려고 온갖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

3. 계시록 세 구절의 해석

앞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관련된 용어의 의미에 대해 대략 설명했다. 그러면 적용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간략하게 설명한다. 나머지는 읽는 분들이 각자가 자신의 시각으로 적용하고 해석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가.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앞에서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즉 하나님의 본체는 영원한 신비이지만 피조세계에 드러난 계시를 말한다. 1장 1절에서 계시록에 전개될 그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계시록의 서신을 쓰는 이유를 설명한 후 8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자신이 그 모든 계시의 알파와 오메가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내가 알파와 오메가라’ 선포한 후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말이다. 이 부분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계시의 시작 곧 알파요 마침 곧 오메가인 이유 혹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 하신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잘못된 번역이다.

이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제도 있고, 계속해 있어오고 있으며, 지금 오고 있는 자’로 번역해야 한다. 이를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과 거) ——⇢ (현 재) ⇠—— (미 래)

우리는 시공간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을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과거, 미래, 현재가 통합되어 있다. 즉 그분은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이를 깊이 묵상하면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 한 것이다. 그분은 지금 내 안에, 내 옆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의 중요한 내용이다.

다음으로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계시에 있어서 자신이 전능하신 분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가능한 분이시다. 그런 분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것이 실상이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믿음일 뿐이다.

여기서 ‘전능한 자’로 번역된 ‘판토크라토스’는 그분의 창조세계에 드러나고 계시된 그분의 모든 것이 가능한 힘을 의미한다.

παντοκράτωρ(판토크라토르) – 전능자(the ruler of all, he who holds sway over all things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하시는 분)

* 크라토스 ; 계시된 힘, 창조세계에 드러난 힘

엑수시아 ; 권세, 권위

뒤나미스 ; 능력, 권능

에넬게이아 ; 작동하는 힘(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힘)

나.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근원과 궁극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구절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에 근원과 궁극의 하나님이 더 들어가 있다. 즉 모든 계시의 하나님이면서 모든 것의 근원이며 그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그 뒤에 나오는 설명이 중요하다.

그런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겠다 하신다. 그런데 이 부분도 정확한 번역은 ‘생명수 샘물’이 아니고 ‘생명수의 근원 혹은 원천(the fountain of the water of life)을 주겠다’로 번역해야 한다. 비슷한 말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수 샘물은 물을 바로 주겠다는 의미이지만 생명수의 원천을 주겠다는 말은 곧 생명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 사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요7:37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근원과 궁극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 구절도 중요한데 5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였다. 왜 그분이 근원과 궁극이 되셔야 했는가 그 설명이 나온다. 곧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새 창조로서 자기 아들들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만물들을(롬8:19-22) 새롭게 하고 또 그리스도의 머리 아래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두고자(엡1:22) 한 그것이 지금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물을 새롭게 한 그 원천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이며 근원과 궁극이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근원과 궁극이라”

이 구절은 성경의 마지막과 결론에 나오는 말씀이다. 에덴동산에서 모형으로 나타났던 네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되었고, 창세기에서 아무런 설명이 없었던 생명나무 심지어 선악과는 열매가 언급되었지만 생명나무는 열매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 생명나무가 바로 생명수의 강 좌우에서 열두 열매를 달마다 맺고 있음을 마침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첫 날에 광명체가 있기 전에 나타났던 그 빛이 바로 주 하나님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2절에서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신 후에 바로 자신이 어떠한 분임을 최종적으로 선포하신다. ‘나는 모든 계시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또 모든 것을 시작하고 그것을 나의 기뻐하는 뜻대로 이루고 그리고 내가 그 모든 것의 근원이며 궁극이다.’ 이렇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심판은 의롭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 앞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그분이 하셨으며, 그분이 이루셨다! 아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가 있다. 다른 두 구절에서는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근원과 궁극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처음과 나중 곧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에 대해서는 이 구절 자체에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 전체가 바로 처음과 나중 곧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에 대한 大河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역사와 시와 예언과 복음과 편지와 같은 무수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와 함께 쓰고 기록한 바로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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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로 시작과 마지막을 뜻합니다. 목사님의 가운이나 강대상에 자세히 보시면 이러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그러면, 어떤 뜻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를 구체적으로 말하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겨울은 겨울 입니다.날씨가 억수로 겁나게 춥습니다. 계속되는 영하권 날씨 바람까지 부니 체감온도 더 내려 갑니다.

아직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수천명이 나오는 이때에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더 깊어가고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지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것 같습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면 뭘 준비하면서 참고 견딜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군대시절에도 들어갈때가 있어면 제대할때가 분명하니까 힘든 병영생활 이지만 인내할수가 있었지요. 저는 80년대 초에 군에 들어 갔는데 전방전투부대라 거의 매일같이 4km 완전군장구보,실탄10발주고 6발이상 목포물 맞추지 못하면 그날 반은 죽는날, 살벌한 저녁점호시간,줄빳따,고참들의 구타ᆢ 아무리 힘들어도 참습니다.

‘그래도 국방부 시간은 돌아간다 ‘하면서요.끝이 보이니까요. 이추위가 아무리 매섭고 강하더라도 우리는압니다.지나가는것이고 머잖아 봄이 온다는것 알기에 참을만한 합니다.

초대교회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마찬가지 입니다.로마 네로황제,도미티안황제때 예수님믿는자들을 엄청나게 핍박하였습니다. 경기장에서 사자의밥이 되고 가로등에 인간햇불이 되고 온갖고문으로 죽어갈때도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기에 죽어도 산다는 부활 신앙이 있기에

알파가 되시고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 즉, 시작과 마지막이 되시는 하나님,전능하신 하나님,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오실 것을 알고 믿기에 죽음까지 참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면 얼마든지 인내 할수 있다는것 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달이 지나면 이 모든 고난은 끝난다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꺼꾸로 메달아도 한달은 참고 또 참고 버틸수가 있지 않을까요.

근데,지금 코로나19 전염병은 언제 끝이 난다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몇달 지나면 끝나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은 추측일뿐입니다.백신을 계속 맞으면 곧 종결되겠지 하지만 이것도 모릅니다.바이러스 전염병이라 어떻게 돌연변이가

되어 나타날지 모릅니다.그러하기에 긴장이 되고 긴장 됩니다.

그래서,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은, 사람, 이세상에서 상황, 변수가있고 잠시 바뀔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시작과 끝이 분명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알파요 오메가 이십니다.’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ㅡ계1:8 ㅡ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올해도 이틀 남았습니다.1월 시작해서 12월 끝이 납니다.해년마다 분명한 시작과 끝을 보여 주는것은 우리 인생에도 분명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알게 하고 이것을 주장하시는분은 하나님이시라는것 알게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이시고 복음의 시작으로 영혼구원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님,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심판주로 올 자요,전능하신 하나님 더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바라 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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